안준섭展_구르는돌
2019. 08. 20 - 09. 23

 

Work
Artist Biography
Essay

격렬하나 침잠된 생의 의지, 불확실성에 담긴 경계에 서다

 

1.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의 고독함, 씁쓸한 단상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옮긴 과거와 달리 작가 안준섭의 현재 작품에는 격정적 느슨함이 존재한다. 격한 붓질 속에는 타자와 부딪히며 존재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이 배어 있고, 중층의 색 내부엔 세계내존재임을 부인하진 않는 작가의 시선이 들어 있다. 그것은 보다 내적이며 은유적인 상황으로 자리한 채 오늘을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옛 작품들을 보면 사회 속 구성원으로 위치하는 인간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들이 이입되어 있다. 1996년 첫 번째 개인전 이후 한동안 지속한 <우리는 일상 속에서>를 비롯해, <우리를 기다리는 것으로>, <그곳에 일상이> 등의 작품을 봐도 그렇고, 2007년 작품전에 출품된 <덮혀진 땅> 과 <매립지에 난 풀> 연작(이하 ‘매립지…’)을 봐도 그렇다.  

지하철 안팎의 풍경을 묘사한 전자는 모노톤 혹은 무채색 위주의 그림으로, 제목에서처럼 어딘가 모를 친숙하나 낯설기만 한 일상을 소환한다. 동시대를 살아가지만 무관심한 초상으로, 보편적 소외와 배척을 은유적으로, 복잡하게 그리드(GRID) 된 관계를 포함해 주체와 객체 간 외적인 것과 내적인 상황을 덤덤하면서도 건조한 여운으로 가득 채워놓았다는 게 특징이다. 

후자는 ‘매립지’ 라는 소재를 통해 ‘개발’ 아래 잃어가는 것들에 관한 씁쓸한 시각이 지배적이다. 원근법이 실종되어 내러티브를 제어하는 이 작업들은 지워지고 덮이는 것들이 단지 물질적인 것만은 아님을 고지하며, 발전•발달이라는 미명 아래 덮이는 것들 가운데는 기억과 불안, 상실감도 내재되어 있음을 말한다. 물론 작품의 의도를 반영한 구체적인 기술(記述)도 없지는 않다. 

예를 들면 황토색 흙과 제멋대로 자리한 투박한 돌은 일상의 황폐함과 건조함, 적막한 불안마저 포괄하는 사물이다. 넓게 파노라마 형식으로 구성된 캔버스는 광활한 땅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며, 두텁게 발린 마티에르와 색들은 그 대상에서 획득한 작가 감정의 다른 말이다. 

눈에 띄는 건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작가를 포함한), 상실의 시대를 걷고 있는 우리의 삶을 반영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매립지…’ 시리즈의 경우 다분히 현실적인 주제를 통한 예술의 고유한 역할에 대해 자문하는 경향과 더불어, ‘포용’까지 이야기 한다는 점이다. 매립에 따른 오염마저 끌어안는 땅, 인위로 넘치는 사회에서 잃어가는/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도 많은 땅이지만 만물의 근원이자 생사의 터전인 땅은 재생의 의지를 멈추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끝없는 ‘치유’와 ‘희망’의 상징으로써의 ‘감싸 안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야생의 ‘풀’(익명의 풀)은 그 ‘감싸 안음’을 증거 하는 실질적 조형요소이다. 훨씬 오래된 ‘숲’ 작업 뒤 그의 작품마다 등장하는 이 풀들은 척박한 환경 내에서도 꿋꿋하게 견뎌내는 개개인의 의지(픽셀화 된 그의 ‘숲’ 작업에서도 개인에 대한 주목도는 높았다)와, 그 배경인 희망에 관한 기대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기호이다. 배려와 이해, 이타적인 삶에서 요구되는 포용의 힘을 나타낸다. 궁극적으론 자연의 생명력과 에너지를 통한 어떤 가능성을 덧칠하는 요소이다.

 

2. 그러나 2006년에 열린 개인전 ‘어떤 상황’(A Situation)은 앞선 작업들과 다른 결을 유지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시리즈는 오늘날의 작업을 연 시원으로써 중요한 위치를 담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상황> 연작은 작금의 작업과 맞닿는,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실증과 이성이 주축이 된 계몽주의적이었던 입장에서 경험론의 한 형태인 감각으로, 주지주의(主知主義)적인 시각에서 주정주의(主情主義)로 선회하는, 변화의 시그널(Signal)을 담고 있다. 

여전히 언뜻언뜻 지하철 풍경에서 읽히던 사적-공적 관계의 그물망이 드리워지고, 나와 연관된 일상의 흔적들, 상황들이 발견되며, 풀 한 포기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도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음은 사실이나, 형상성 강한 이전 작업과는 달리 이 당시부터는 감정과 정서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방향을 틀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때부터 이미지는 일부 인체를 제외하곤 한결 추상화되며, 각주를 배제하는 대신 선과 색, 면이 주요 조형으로 자릴 잡는다. 이전의 거친 화면은 다소 정돈된 질서 아래 놓이며 덜 설명적이면서 보다 ‘의존된 감각’에 기우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시각 언어는 물론 앞서 진행된 1996년 인사갤러리 추천작가전에 선보인 작업들이나 이후 마련되는 ‘매립지에 대한 소고’ 전(2007), ‘땅에서 세상을 보다’ 전(2009), ‘작은 단상’ 전(2010) 등과는 확실히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2006년 ‘어떤 상황’ 전과 관련해 흥미로운 부분은 이 즈음 이르러 특수하고 개별적이며, 존재 의미에 대한 탐구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근본적으론 ‘존재방식’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주변화 된 우리에서 ‘현존재’(Dasein)에 관한 예민한 자기투영이 이뤄지는 시기이자, 작가의 철학내지는 가치관이 진하게 스며드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그래서인지 굳이 친절하지 않은 그림임에도 우린 ‘어떤 상황’ 전 이후 그 어느 때보다 표상체계를 통한 감정교류가 수월해지고, 물성과 반비례한 관념의 노획을 통한 찰나의 연속인 존재에 관한 자문을 더 이슥하게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한층 은유되면서 자기중심적 내면화가 엿보이는 흐름은 과거의 작업과 변별력을 지니게 하는 원인이다. <어떤 상황-우리나라>를 비롯해, <어떤 상황-그해 여름>, <어떤 상황-예술가>, <어떤 상황-놀기>, <어떤 상황-삶>, <어떤 상황-자화상> 등의 작품에서 열람되듯, 이 상황들은 드러남과 감춰짐이며, 그 둘은 상보적 작용을 거치며 작품 내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마치 억 겹의 나날을 드러내는 것 마냥 서서히 말라 고착된 채 집약된 삶의 궤적에서 체감했을 법한 ‘어떤 결’ 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특유의 자연적이며 본질적인 것을 탐구해온 작가 작업에서의 맥락은 유효하다. ‘매립지…’ 연작에서 이해했듯, 자연을 정복하고 사회와 인간 정신을 개조함으로써 무한한 진보 발전을 기대하고 지상천국을 꿈꾸던 근대인이, 도리어 기계로 대변되는 문명과 대중 속에서 그 본래적인 자아를 소외(-상실)하고, 그곳에 가장 근원적인 현대문명의 위기와 갈등이 숨어 있다는 메시지도 살아 있다. 특유의 리듬감 있는, 다시 말해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있는 내재율(內在律)이라는 특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도 이 즈음이다. 

 

3.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안준섭은 여러 번의 개인전을 치렀으나 ‘매립지…’에서의 자국들을 완전히 걷어내지 않는다. 그러던 중 2019년에 이르러 2006년의 과거와 다시 조우한다. 그러나 그 당시와 온전한 쌍둥이는 아니다. 일종의 후기에 해당한다는 게 옳다. 

작가 안준섭의 근래 작품은 감정과 감각 중심의 전개가 확연하기에 표현주의(Expressionismus) 의와 등선을 이루는데, 의외의 공명이 있다. 역대 표현주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 공명이란 반드시 재현의 영역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자아의 투사, 심리의 그늘 밑에서 피어난 감정, 의지와 같은 여러 심리적-정신작용의 결과이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에 20세기 추상화와 표현주의 양식에서 곧잘 드러나는 환상과는 거리가 있다. 도리어 현실계에서의 결핍과 충족의 조형적 인용이 투사되어 있으며, 과거의 작품 내부에 자리 잡고 있던 “불규칙적이며 정리되지 않는 상황” 이나, 어떤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갈망, 예술가로써의 삶을 지정하는 경계와 인간 삶이 지향할 자유로의 의미가 짙게 배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의식을 소실점으로 하며, 그 소실점을 축으로 색과 상징으로써의 덩어리, 감정이 교환되는 모든 것을 조합한 조형이 만들어진다.  

감정, 이 감정이 적절하게 구사되는 첫 번째 지점은 색(色)이다. ‘매립지…’ 연작만 봐도 그는 채도가 명확하지 않은 회갈색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는 매립지의 불분명함과 모호함, 도시화와 인위성에 무심한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어쩌면 작가를 둘러싼 생태변화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혹은 어떤 것으로도 정의될 수 없는 신비로운 자연을 뜻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당시의 색은 철저히 불완전했고 작가에 의한 자기 지시성이 명료했다. 하지만 오늘의 색은 무게와 부피를 가지지 않으며 애매하거나 난해함에 분동이 기운다. 음악적 율동이 들어 있고, 심상에 따라 색은 달라진다. 여백과 도상은 그 심상의 일부이다. 

근작에서도 붓이 지나간 흔적, 즉 행위의 표상인 자국(Touch)은 중요한 표현요소이다. 중첩되거나 내속화되는 그의 붓질은 시공의 터울을 언급하면서 밀도를 생성하고, 동시에 화면에 생생한 활기를 불어넣는다. 따라서 그것만으로도 조형성은 완성된다. 하나, 무엇보다 눈여겨봐야할 부분은 균형감이 느슨한 긴장감이 강한 이 붓질이 곧 작가의 감정선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가까이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지만 멀리 보면 공유의 매개로써 우리를 사유의 세계로 안내하는 즉흥적이고 단시적인 통로이다. 

결과적으로 크거나 작게 도포된 색과 거친 붓질은 더 이상 이게 무엇이라는 설명에 치우치지 않는다. 과거 표현주의자들이 그러했듯, 안준섭의 색과 행위에서도 직관적 흐름이 다분하다. 당연히 형태는 모방에 충실하지 않는다.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으로 직립하며 선, 형태, 색채 등은 그 감정과 감각의 표현가능성만을 위해 이용된다. 

작업실에서 마주한 수 많은 작품들을 보며 느낀 것인데, 그의 근작들은 한편으로 흔히 초현실주의자들의 몫으로 치부되는 자동기술법(automatism)의 양상도 없진 않다. 주지하자시피 자동기술법은 무의식적 자동작용을 말하는데, 의식이나 의도 없이 무의식의 세계를 무의식적 상태로 대할 때 거기서 솟구쳐 오르는 이미지의 분류를 그대로 기록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는 필자의 해석일 뿐이다. 그의 그림들은 무언가를 정의하거나 힌트를 제공하지 않는다. 완벽한 형체로 채워지지 않기에 추측도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수없이 가로지르는 색들은 흡사 사회적 관계 속에서 거주하는 인간의 양태를 포박하듯 비춰지고, 몇몇 기하학적 도상은 마치 자연이 베풀어준 그대로를 거두며 사는 삶인 아르카디아(Arkadia)의 세계인 냥 존재한다. 그리고 텁텁한 붓질은 그 세계를 열람하게 하는 거의 가치 있는 메신저이다.

 

4. 안준섭의 신작들은 주석을 제외한 작품들임에도 내용적으로 밀도가 높아졌다. 흡사 나무가 나이테를 두르듯 삶에 관한 태도가 진솔해지고 있으며, 이는 예술가로써의 순연의 삶, 운명일 수 있는 현실에 관한 작가적 서술을 더욱 빛나게 한다. 조형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색으로 인해 자칫 화려해질 수 있는 측면도 불완전하고 격한 색채와 붓질에 침식된다. 

그럼에도 삶을 지탱해온 무언가의 한 귀퉁이에 의지한 채 본능적으로나마 느끼는 유토피아를 향해 놓여 있다가 처절하게 말라 타들어가는 초라한 존재감이 배회한다. 그런데 이 존재의 불안감은 2013년 및 2014년 ‘흐름’(Flow-A diary)에서 나타난 ‘평평한’ 불안감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근래 작업에선 충분히 가시적인 기하학적 구성(표면적으로 면과 선, 색과 행위라는 조형요소와 원리)을 통한 유보의 관념과 가감의 보류라는 개념으로 인한 어떤 ‘목마름’이 더욱 부각되는 양상을 띤다. 굳이 단어로 옮기자면 ‘절충’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 가감은 곧 비움과 채움의 활성화(또는 정체화)를 나타내며 ‘비움’은 ‘채움’의 여백주의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뜻밖의 ‘목마름’을 획득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특히 근작들은 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해석되는가에 방점이 있으며, 기록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아와 기억 등을 밑동으로 한 경험과 사고로 ‘현실을 새롭게 보는 방법’에 관한 문제라는 것에 핵심이 있다.  

또한 그의 그림들은 사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표현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결과 빚어진 장면들로 이어지고 있다. 이곳엔 세상을 독해하는 방식과 의도의 명징함을 투영한 틈, 그리고 확장일로의 경계와 분리된 지형적인 요소의 파편, 새로운 생경함을 창조하고 사회적 관계성을 변증법적으로 섞으려는 작가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색과 선의 조합은 의미적이다. 경험적 사고 없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균등하게 산포하는 유일한 도구이면서 존재성과 의미를 담아내는 거푸집이다. 내면과 마주하는 통로이자 거울이고, 자신만의 예술적 정신과 가슴에 끝없이 쌓이는 희로애락을 담은 장렬한 장소/공간 이다.

한편 누구에게나 인식 가능할 만큼 이해가 원활한 것도 아니고, 취합의 구조 역시 이치를 따지기도 어려우나, 그는 물리적, 심리적 제약 혹은 원초적 내면을 작품에 그대로 수용하여 자연스럽게 삶의 일상성이 미술에 침투하게 둔다. 그런 탓인지 그의 작업에는 끊임없이 길을 잃고 헤매면서 길을 찾으려는 뜨거운 몸짓, 현실을 터전으로 한 억눌림과 비틀림, 작가로서-인간으로써 살아야 할 동시대 희망과 애환이 서려 있다. 

이밖에도 그의 작업에는 불안한 위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예술가이자 현대인으로써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을 은연 중 녹여내고 있다. 필자는 문득 이것이 그의 ‘구르는 돌’이 지정하고자 하는 실체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격렬하나 침잠된 생의 의지, 불확실성에 담긴 경계의 세계에 선 그와 우리야말로 그 구르는 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홍경한(미술평론가)​